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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일강의선물 이집트 -(나라살림 흥망사2)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나라살림흥망사2

 

문자의 발명

문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에 대해 많은 학설이 있다. 서로의 약속에 의해 생겼다는 유물론적인 견해에서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라는 관념론적인 견해까지 아주 다양하다.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다양하게 해석해 보면서 진실에 접근해갈 수 있다.

 

이중에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기원전 4천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명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고민이 생겼다. 공동체가 관개수로를 건설하면서 생산력이 증대하자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자 마을의 살림을 맡은 족장들은 고민이 생겼다. 부족원이 많아지면서 누가 세금을 냈는지를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점토판에 기록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벼이삭 모양은 밀이라는 뜻이고, 소머리모양은 소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약속한 것을 점토판에 그리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기호를 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설형문자이다. 바로 문자는 세금을 걷고, 관리하며, 사용하기 위해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문명과 함께 시작된 조직, 지도자는 지배자로

문명은 두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뺏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집약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 있었다. 전쟁은 제로섬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섬 게임이지만 농업발전은 플러스섬 게임이다. 당연히 협동을 위해 공동체가 생긴다. 협동을 통해 ‘관개와 배수공사’를 해야만 경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량은 창고에 보관했다. 이를 저장하고 분배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 되었고 창고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그리고 문자를 기록하게 되면서 지식이 쌓이고 우주의 움직임까지 설명하는 마술적인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모든 강에서 문명이 발달한 것은 아니다. 기름진 양쯔강유역보다 척박한 황허강 유역이 문명을 건설한 것을 보면, 인간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는 축복받은 곳이었다. 축복은 나일강이 선물한 것이다. 길이가 6650km나 되는 세계최대의 나일 강은 아프리카 대륙의 10분의 1이나 되는 유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수량이 엄청나다. 따라서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류에 실어 날랐고 이 토사가 하류의 삼각주를 기름지게 만들어 비료 한번 쓰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이집트의 밀이 제국을 지탱해 주었고, 18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보다 두 배나 많은 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일 강의 범람은 풍요를 약속하는 나일여신의 축복이다’라는 말도 있다.

 

당시 피라미드는 홍수로 일할 수 없는 7월에 건설되었다. 나일 강은 열대지방에서 시작되는데 5월에 열대성호우가 내리면 하류까지 오는 데 2달이 걸렸다. 그래서 이집트에는 7월에야 홍수가 발생하는데 말이 홍수지 날씨도 화창하고 물살도 매우 약해서 주변을 거의 파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홍수와는 개념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홍수는 홍수여서, 농한기가 한여름에 있었던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10년씩이나 걸렸던 이유는 이렇게 짬짬이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집트에서 측량술이 발달한 이유는 홍수로 쓸려가서 경계선이 없어진 농토의 소유지를 구분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수가 심하면 세금을 늘려 잡았다는 점이다. 홍수가 심할수록 더 많은 토사가 내려와서 땅이 기름지게 되고 그 해에는 풍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홍수가 발생하지 않으면 흉년이 되어 기근이 발생하는 국가위기상황이 되었다. 왕조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홍수와 가뭄의 경계는 불과 몇 미터의 수위 차이였다.

 

 

 

축복을 신전건설로 낭비한 이집트

나라가 잘사는 것과 국민이 잘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도 성장과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상관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삶이 더 고달파 질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건설하지 않았다. 대부분 농부들이었다. 농부들은 연중대부분을 들판에서 보내고, 파라오에게 군역을 졌으며, 2년에 한번씩 징수관이 와서 새로 세금을 매겼다.

 

이집트에게는 나일강이라는 축복이 있었다. 홍수도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건일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재앙이 될수도 있었다. 우선 지배계층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위협이 없으면 다른 일을 벌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념물의 건립이다.

 

지배계층은 자신이나 자신의 기념물에 갈수록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신관들의 세력을 누른 파라오들이 자신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그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여름철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소득을 분배하는 공공근로같은 경기부양효과를 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집트의 노동자는 매달 1.5자루의 보리와 네자루의 에머밀을 받았고, 서기와 조장은 두자루의 보리와 5.5자루의 에머밀을 받았다.

 

결국은 자신들이 권력유지와, 자의식을 채우기 위한 전시행정에 자원을 소비하고 사람들을 고달프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은 일찍부터 정체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는 문자를 아는 즉 왕과 귀족관료들만이 알았다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짧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이런문제를 알수 없었다. 그래서 애덤스미드는 이 당시의 노예들을 ‘눈먼 자들’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투명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공통으로 이어지는 문제이다. 마치 당시에 신관들이 자기들만이 문자를 알고 기록하고 보여주지 않았듯이, 지금 권력자들도 자기들만의 언어(혹은 방식)으로 기록하고 시민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의 4대강이나, 대규모 국책사업, 더 나아가 대자본의 거대빌딩들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눈먼 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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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송주영. 이집트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

레리 고닉. 이희재 옮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 궁리 2006

조루즈 장. 문자의 역사. 시공사 2002

정규영.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여름언덕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