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인식에 유럽은 ‘똘레랑스’ 즉 ‘관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분쟁이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몇 건의 커다란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단연 중요한 계기는 30년 전쟁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그 규모도 유럽 최대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독일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개입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종교개혁가 후스의 고향이었던 보헤미아(지금 체코의 서부이다)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었다. 1617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니난드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신교도 예배를 중지하는 법을 공표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궁을 습격해 고관 2명을 창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우발적 사건이 스웨덴과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참여하는 30년간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은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천600만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서 600만으로 줄었다. 이런 결과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신교든 가톨릭이든 종교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났다.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이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조약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을 바친 이후에야 종교적 집착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와진 것이다. 그 후 유럽의 다자간 정치질서를 ‘베스트팔렌체제’라고 한다.
전쟁의 최종결과는 신교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지만 경쟁국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신교도를 지원한 프랑스의 역할이 컸고, 프랑스는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이때 독립을 공인받았고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의 중립은 그들의 노력도 있지만 엄청난 피를 본 유럽인들의 교훈 때문이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난 마지막 종교전쟁이 되었고, 자유로운 국가들의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시에 힘을 모으게 되어, 종교를 앞세운 전 세계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행도 동시에 찾아왔다.
동양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종교분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 종교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득을 주지 못하고 공동체의 황폐화만 가져온다. 물론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직선적인 역사관만큼이나 꼭 피를 보아야만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도 안 된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를 서구인처럼 생각하여 타종교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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