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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나라에 '왕권제' 없는 이유

21세기에 접어든 현대사회에서도 이름뿐인 존재이지만 왕이 있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는 왕이 있거나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존재해왔다. 비록 직접통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도 왕정폐지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실들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존경받는 건강한 보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상징하면서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국왕이나 문제는 많지만 품위를 지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표적인 왕들이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다. 비록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칭 ‘새로운 우익’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명히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광복 후 18년이나 지난 1963년 귀국한다. 해방이 되고서도 귀국하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 때문이다. 명분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이 씨 양녕대군파인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폐인물이 모두 이 씨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아무튼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영친왕을 귀국시킨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를 신기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뿐 관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것은 탄압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의 왕족들이 자초한 것이다.

의친왕 이강(李堈) 정도가 일제에 비협조의 저항 했을 뿐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제에 순응했다. 더구나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층에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일제에 협조했다. 신기한 것은 800명의 군대 대부분은 의병이 되거나 낙향하여 교육사업 등을 벌여 저항했으나 4천200여명의 중앙관료들과 경찰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한일 합방을 한 다음날 1천700만원의 은사금을 각 지방의 양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때 쌀 한섬이 3원이었으니 지금 시세로도 1조에 육박하고, 당시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을 다 사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조선의 지배층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판 것이다.

또한 1910년 10월 76명의 양반이 후작, 자작, 남작으로 구성된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받았다. 한마디로 매국노들에게 일본귀족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이중 민영환이 자살로서 항의하는 등 13명이 거절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읍해 했다. 당시 친일파 귀족들이 수령한 은사금은 모두 605만엔으로,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천6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완용은 당시 15만엔을 은사금으로 받았는데,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30억원에 해당한다. 특히 총리 대신에 오른 직후인 1907∼1910년 전국에 걸쳐 15건의 재산증식이 이뤄졌다.

이러니 우리나라에만 왕당파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혁명 등의 역사적 단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나머지 대중들에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명문집안이었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조상님들은 얼마에 나라를 팔았소?”   

 

 

* 이 글은 2008년 8월 25일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