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은 문명성찰의 기회 |
우리 인류역사에서 인구가 감소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을 들라면 우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제일 큰 원인은 뜻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다. 그나마 전쟁에서도 직접 전투 중에 사망한 경우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투에서는 대개 사망자보다 부상자나 포로가 많다. 가장 유명한 전염병은 흑사병이다. 흑사병은 페스트(pestis)라고도 한다. 증상으로 피부 밑에 검은 피물집이 생기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했다. 흑사병은 역사상 단 한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흑사병에 따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 것은 1348년에 시작된 흑사병이다. 자그마치 50여 년 동안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천500만여 명이 사망했다. 유럽은 200년이 지난 13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구를 회복한다. 이후 흑사병이 다시 유행한 것은 1894년 중국의 광둥에서였다. 이 후 20년간 전세계에서 1천만 명이 사망했다.
흑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몽고족 유포설이다. 1347년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인 킵차크칸국의 군대가 크림반도에 있었던 제노바의 교역소를 공격했다. 그때 몽고족이 페스트 환자의 시체를 대포로 쏘아보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제노바인들로 인해 유럽에 페스트가 퍼졌다는 주장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것은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려는 심리속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인종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맞물려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몽골 전래설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 중국도 페스트로 1340년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강남 어느 한 성(城)의 주민 90%가 사망하는 재앙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원인이 되어 몽골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8년 뒤 몽골제국은 붕괴했다. 몽골 역시 흑사병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흑사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다. 기근과 영양결핍 그리고 불량한 위생환경이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문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병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사망자는 대부분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인 생활조건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의 사망률은 매우 낮았다. 부자들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간 집에 실험적으로 거주하게 했다. 전염병의 재앙 속에서도 계급성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전염병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에는 구대륙에 못지않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에는 이미 2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많은 아메리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200년 안에 95%의 아메리카인들이 사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전해온 천연두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에 준 축복은 복음이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전염병은 이런 몰살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했고 흑인노예들을 수입해야했다. 당시 아메리카에는 가축이 단 5종에 불과했다. 칠면조, 라마, 기니피그, 사향물오리, 개가 전부였다. 소규모였고 인간과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전염병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럽인의 출현과 그들의 선물인 세균은 면역력이 없었던 이들을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린다. 코르테즈가 600명으로 2천만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피사로가 168명으로 수천만의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숨어 있는 이유이다. 최근 사스와 광우병, 조류독감에 이어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다. 전염병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교통의 발달로 순식간에 전세계에 영향을 준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까지 하면서 위험요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