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11시 종로거리에 화톳불이 밤새 타오르고 있다. 11세 소학교 학생 장용남은 똘망똘망한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연행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호소는 집회장을 뒤 덮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시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언뜻 예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장이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실제 1만명 이상이 모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고 일컬었다. 그 시절 서울의 인구가 17만으로 추정되는데, 만민공동회의 참가자 수가 보통 1~2만, 많을 때는 수 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시국위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년 장용남의 연설이 있던 ‘화톳불 집회’는 12일간이나 계속될 정도의 열기였다. 거지부터 군인까지 참여하고 돈을 내는 운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1차 만민공동회 회장은 현덕호라는 쌀장수였다.
1898년은 민비가 시해당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였다. 하지만 각국의 이권침탈이 자행되었고,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에 되어 있던 혼란과 위기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때 신문 등의 다양한 언로를 통해 대중들은 현실문제에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했던 시기였다. 당시 대부분인 문맹자들을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업을 이룰 정도로 소통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을 이러한 대중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소통하지도 않은 채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어용 보수단체와의 일부 폭력충돌을 문제삼아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대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람사는 사회의 본능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집회 즉 모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유가 당연한 원리로 인식하는 근대사회에서 이는 의심받지 않는 권리이다.
프랑스에서는 ‘공개집회’라는 집회운동이 있었다. 1868년 합법적으로 집회의 자유를 인정받은 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871년의 파리꼬뮌을 가능하게 한 운동의 한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보수세력이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후 광장집회의 의미를 느끼게 된 대중들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지고,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집단지성이 형성되어 파리꼬뮌이라는 민중들의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로 생각해보면 광주민주화운동도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금남로의 대중집회를 통해 일시적 자치를 이룬 사례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파리꼬뮌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혼란은커녕 매우 안정된 치안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억압이 해소되고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대중의 힘은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소제도도 집회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지부상소’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도끼를 들고 가서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며 목숨 걸고 상소한다는 뜻이다. 궁궐 앞에서 일종의 1인 시위를 하면 그 주변에 지지자나 구경꾼이 모이는 공개된 대중집회가 된다.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충선왕 때의 우탁이 선왕의 후궁을 범한 것을 규탄하는 도끼상소의 사례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대중집회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893년에 정치개혁과 외세개혁을 요구하던 동학교도들의 보은집회가 있다. 당시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의 집회는 이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모델이 된 것을 보여진다.
집회의 자유를 허하라
헌법재판소는 오래 전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최소한의 상식에도 기뻐하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가진 표현의 자유라면, 집회결사의 자유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보완적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집회는 의견을 모으고 저항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정당한 후의 결과는 항상 비극이다. 구한말에 만민공동회의 ‘화톳불집회’가 강제해산된 후 그나마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초래했다. 1백년후 촛불집회 역시 많은 억압의 결과로 개혁도 아닌 후퇴를 막으려는 대중의 요구가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끼상소를 했다 해서 정말로 도끼로 목을 치는 왕이 없었듯이 나를 잡아가라
고 집회를 여는 시민들을 잡아가서는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거든 말이라도 하게 해달라. 집회자유를 허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