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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으로 망하지 않았다

착각속의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포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에서는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으레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심각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불리운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고, 이런 까닭에 우리 주변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진실은 다르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다르다. 옳으면서도 인기 있는 정책이 있고, 옳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정책도 있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최근“인기를 끌고 인심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선진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이나 세종시반대등의 정책을 독선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신념도 문제지만 엘리트주의까지 가진것 같아 경악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이 엘리트처럼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2008년 시민의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