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혼란이다. 2012년 대선 후보로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했을 때부터 ‘2014년 예산전쟁’은 막을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박 대통령의 공약을 두고 야권은 물론 새누리당 안에서조차 “국민을 속이는 것”(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세제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는 반응이 나왔다.
정부가 기초연금과 무상보육(3~5살 누리과정) 예산을 지방에 전가하고, 무상보육 예산의 부족분을 야권 ‘대표상품’인 무상급식 예산에서 충당하도록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근본적 이유는 ‘세수 부족’이다. 세금으로 걷힌 돈이 부족하니 대선 때 약속한 복지 비용을 지방에 떠넘기려다 사달이 난 것이다. 애초 정부는 올해 재정 적자액을 25조5000억원으로 잡았지만 실제 이 규모는 3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세수가 줄어든 탓이다.
정부는 글로벌경제 위축 여파로 국내경기가 침체돼 세수 감소가 불가피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야당은 잘못된 세제 탓으로 돌린다. 이명박 정부 시절 단행한 ‘부자감세’를 원상회복하지 않아 심각한 세수 결손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야당은 “집권세력이 정치적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무능과 의지 부족에서 초래된 문제를 ‘중앙 대 지방’, ‘보수 대 진보’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다.
박근혜정부 ‘증세없는 복지’ 모순
부자증세·법인세 근본대책 한계
“보편적 복지 위해 보편적 증세를”
전문가들 ‘사회적 논의 시작’ 주문
야권 주장대로 ‘부자감세’를 철회하면 부족한 복지재원을 충당할 수 있을까. 야권은 법인세 감세를 철회할 경우 한해 9조6000억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년에 시·도교육청이 부담해야 할 2조2000억원의 누리과정 예산에 지자체가 감당해야 할 기초연금 부담액 2조4000여억원을 더하고도 남는 규모다. 하지만 법인세 인상이 대안인지에 대해선 견해가 엇갈린다. 정부는 “법인세 인하가 세계적 추세인 만큼 감세 전인 2008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실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법인세 비율은 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0%)보다 높다. 24.2%인 명목 법인세율 역시 오이시디 평균(25.3%)과 큰 차이가 없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법인세 인상에 매달리기보다, 토목·개발사업 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출구조를 바꿔 복지투자 여력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출구조 조정이 근본 대안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적지 않다. 4대강 사업과 해외자원개발 사업 등에 막대한 예산을 썼던 이명박 정부와 달리 박근혜 정부에선 삭감할 수 있는 토목·개발 예산의 비중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토목·개발사업 비중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고, 어지간한 사업은 민자사업으로 전환돼 국가지출 규모가 크지 않다”고 했다. 국가재정 규모 자체가 작아 지출항목을 조정해서 마련할 수 있는 재원 자체가 크지 않다는 진단도 있다. 실제 올해 우리 정부의 재정규모는 지디피의 30.3%로 오이시디 평균(40.8%)을 크게 밑돈다.
이런 이유로 근본 해법은 부유층뿐 아니라 중산층을 포괄하는 ‘보편적 증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한국의 지디피 대비 소득세 비율은 3.8%로 오이시디 평균(8.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 명목 소득세율은 최고 41.8%에 이르지만, 평균 실질 소득세율은 4.2%에 불과하다. 이는 8%대로 추산되는 오이시디 평균에 견줘도 턱없이 낮다. 급여생활자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공제 혜택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세 전문가들은 한국에선 소득세의 증세 여력이 가장 크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조세체계 전반의 신뢰도가 낮아 증세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크다는 점이다. 여야 정치권이 증세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의제화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재정·복지 전문가들은 ‘지속가능한 복지’에 필수적인 재정구조 마련을 위해 부자감세에서 보편적 증세, 세대간 고통 분담까지 다양한 대안을 함께 논의하는 사회적 협의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때마침 집권여당 안에서도 ‘증세 불가피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지난 대선 당시 합리적 조세 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국민대타협위원회’ 설치를 공약한 바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 디자인에 참여했던 안상훈 서울대 교수는 “스웨덴과 독일 등 안정적 복지시스템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국가들은 재원과 복지 수준에 대한 대타협의 시기를 거쳤다”며 “우리도 증세를 포함해 큰 틀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정치를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