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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과거의 계모임, 현실의 다복계


과거의 ‘계모임’과 현실의 ‘귀족계’
   
장안의 화제 ‘귀족계’ 형성이 궁금하다
서민의 안전핀·경제활동, 변질의 역사

  
다복계라는 ‘귀족계’가 장안의 화제다. 마치 전통문화가 되살아오는 기분이다. 계(契)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회제도요 조직 형태이다. 다른 문명권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계처럼 고대부터 사회구조 속에 포괄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없었다.

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오랜 전통 속에 조금씩 형성되어왔기 때문인데, 가정
멀리는 삼한시대 공동유희인 제례(祭禮)와 회음(會飮) 등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계와 비슷한 모임들이 성립 발전하였는데, 그 예로서 여자들의 길쌈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다.

삼한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고려시대에는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계가 나타나는데, 12세기 중엽 유자량(庾資諒)이
동료들과 함께 조직한 문무계(文武契)를 조직하였다고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교계 즉 친목계는
 고려말기까지 상당히 성행하였는데 어디까지나 지배층 내지는 유지들 사이의 사교계로 한정되어
있었다.

계는 1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새로운 종류의 계로 분화되기 시작하는데, 족계(族契)와 동계(洞契)가
 그것이다. 모두 이전의 사교계의 바탕 위에서 분화된 것인데, 그 구성원이 일정 범위의 친족
집단성원이나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한정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서서는 계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범위도 크게 확장된다.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계나 길흉부조를 하는 상계, 소나무의 보호와 선영을 지키려는 송계 등
 다양한 계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상계는 경제적 부담을 해결해야한다는 공동체의 현실적이 필요성
 때문에 신분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다. 18세기 말 이후에는 세금 때문에 생겨난
군포계(軍布契), 호포계(戶布契), 등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관에서 장려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조선전기에는 갹출하는 방식이었으나 후기에는 토지 등의 기금의 형태로 증식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가 공유재산을 약탈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개항초기에는 크림계, 비누계가 처녀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청년들은 닭잡아먹기,
돼지잡아먹기의 계계, 돈계를, 아이들은 떡계, 엿계를 만들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낙찰계’가
유행해서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곗돈을 타서 고리이자로 돈을 불리고 추첨형식으로 곗돈을
타는 방식의 낙찰계는 실패하거나 돈을 떼이면 가정파탄이 오는 등 개인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후에도 60년대 말에는 가발계, 70년대에는 쌍꺼풀계가 유행하는 등 계는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파탄의 주범되기도

속담에 ‘계 빠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뜻한다.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없던
시기에 계는 우리사회의 안전판이요, 유용한 경제활동이었던 셈이다.

계는 우리민족의 유구한 문화이므로 ‘귀족계’ 그 자체를 탓할 것은 없다. 또 곗돈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시비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불투명한 재산형상과 세금추징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상식수준의 의혹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건이 터지자 피해 규모가 큰 사람들이 오히려 사건 공개를 꺼렸다고 한다. ‘검은 돈’의 악취가 솔솔 풍기는 것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