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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개성공단'과 구한말 개성상인의 '좌절'


'개성공단'과 구한말 개성상인의 '좌절' 정창수
2008-11-29 09:45:09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정의는 ‘집에만 있고 바깥출입을 아니함’, ‘집에 은거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거나 사회의 일을 하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유신 72명이 지금의 개성직할시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 연명하며 고려에의 충성을 다짐한 사람들에서 기원하여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두문불출이 되었다고 한다.

'복식부기' 발명한 개성상인

개성은 벽란도와 함께 5백년 왕도였다. 그래서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등장한 조선왕조도 처음에는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옮긴 후에도 개성부라고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조선왕조의 성립 후에는 정권의 기피로 인해 관직에서 소외된 개성인들이 이미 왕조의 전기부터 식자층까지도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널리 알려진 송도사개문서(松都四介文書) 즉 지금의 복식부기인 개성부기를 발명해낸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조선왕조에 비해 국내상업과 외국무역이 발달했던 고려왕조시대의 수도였던 개성은 상업의 중심지 였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후기에 이르자 전국에 걸친 조직망을 가지고 상업활동을 벌이는 한편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래상을 통해 외국무역부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캘리포니아 인삼'도 등장

우세한 자금력으로 전국 거의 모든 상업중심지에 송방(松房)이라고 부른 일종의 지점을 차려놓고 무역을 하고 중국과 일본과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인삼거래를 했다. 일찍부터 자연삼을 수출하던 개성상인들은 18세기 부터는 아예 인삼재배법을 개발하여 개성에다 삼포소(蔘包所)를 두고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여 팔포로 조달했다. 당시 수출량은 1797년(정조21년)에 120근이었던 것이 1851년(철종2년)에는 4만근으로 증가했다. 

처음에는 강계에서 나던 자연삼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 개성상인의 노력으로 재배삼으로 거듭난 개성인삼은 구한말 우리경제의 핵심중의 하나였고, 당시 기축통화인 은을 대체하는 등 자본이 중심이 되는 세계 무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던 대표상품이었다. 모조품으로 캘리포니아 인삼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물론 그 가능성은 식민지로 전락하여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개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도시이다. 더구나 개성공단이라고 하는 곳은 단절의 시대를 지나 이제 남북문제의 상징이 되어버렸을 뿐만아니라, 실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많은 남북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개성공단이 문을 닫을 상황이 되었다.

구한말 당시의 개성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성공단과 관련된 수많은 남북의 한국인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다시 정치적 논리와 실책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단절하고 말 것인가.

차이가 있다면 구체적인 책임자를 찾을 수 없었던 구한말과는 달리 이번 상황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어서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반드시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