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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료는 공동체의 의무, MB정권은


의료는 공동체의 의무, MB정부는?
   
색깔있는역사스케치[52]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병의 위협에 직면해 왔다. 그래서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의료행위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이집트이다.

BC 2700년경의 비석에 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의학서에 쓰여진 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의료행위에 대한 인간의 역사

이집트의 의학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서양의학의 모태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의사로
기록되어있는 사람은 임호텝(Imhotep)이다. BC 2600년경 이집트의 대신이었고,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부자들의 호출에만 응했다.
이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한계가 많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의학이 그리스에 전달되면서 물론 자유민들에 국한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료행위를 하는 문제가 고민되었고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이집트에 대한 선망은 매우 높아서 소크라테스마저도 선진국 이집트를
 찬양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BC 2600년경 황제(黃帝)가 의학교과서인 <내경>(內徑)을 만들어 의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양 문명의 의학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은 외과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이
좀 더 중심이라면 동양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 때문에 약재 중심으로 발전해온 점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동서양 공히 상류층에 국한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은
방치되거나 주술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히 공공의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대중의료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한다. 18세기만 하여도 유럽의 병원에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일종이 격리였다.

한때 빛 발한 북한의 공공의료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중국은 공공의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공공의료정책을 시행했다.
삼국시대에 약부(藥部)나 약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의료정책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에 약점(藥店)을 두고 의사를
 배치했다. 이때 이미 과거로 의사를 선발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창적 의서인 동의보감의
 발간 이후로는 시골 마을마다 균일화된 의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북한은 공공의료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1982년에는 무상의료에
 415명당 의사 한 명씩을 배치하고 의사담당제를 두어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세계의 일부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극찬을 한 이유 중에 공공의료의 완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의료상황은 절망적이다.
공공의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의료물품 마저 없어 응급처치조차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나 남북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매우 부족한 현 정권에서는 해답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