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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의 부흥, 세종이 만들었다

조선의 부흥-세종이 만들었다 

 

 

600년전 조선의 출산휴가

우리나라는 법으로 직장에 다니는 임산부에게는 출산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 물론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출산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 여하튼 복지를 적대시하는 이념적 성향까지 다양한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년전 조선에서도 출산휴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인공은 세종이다. 1426년, 세종8년에, 관청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백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이것을 법에 명시하도록 형조에 지시했다. 이때 세종의 나이 29세이니 이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산전휴가 30일을 더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130일의 출산휴가다.

 

내용을 보면 “옛날에는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간 쉬게 하였다. 아이를 내버려두고 일하면 어린아이에게 해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백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출산시기에 가까워 일하다 몸이 지치면 집에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걱정된다. 법으로 출산 전 1개월을 쉬게 하라. 속이려 들더라도 1개월이야 넘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배려와 혜안이 놀랍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4년 뒤인 1434년에 “여종이 아이를 가졌거나 산후 백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는 일을 시키지 말고 휴가를 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하게 하여 산모를 돌볼 수 없게 되니, 이는 부부가 서로 돕는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도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하겠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남편도 산후 30일간 쉬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내용은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도 규정된다.

 

출산휴가는 세종의 의지

남편에게 육아휴가를 주는 것은 선진국도 최근에야 실시한 것으로서 세종대왕의 이런 조치는 아마도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나라는 대부분은 태아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도였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00년대)에는 태아를 유산시키는 아내를 처벌하고,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해도 아이 낳는 일을 포기할 수 없도록 규정했던 기록이 있다.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나마 이것도 드문 사례일 뿐이다.

 

우리 노동법에는 산전, 산후 모두 합해 9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어서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공공기업이나 공무원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도 공노비들이 이 혜택을 우선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통을 지키려는 차원(?)이 아닐까하는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세종이 이런 정책을 편 것은 단지 어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국가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인구가 늘어야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지배층들도 이것을 칭송했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현재의 기득권세력과는 달랐다. 이것이 조선 초기에 국가가 엄청나게 발전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든든한 재정이 원인-공법

이러한 세종의 복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튼튼한 재정은 공평한 조세제도 덕분이다. 공법이라 불리는 세종의 조세제도는 중국의 하나라에서 시행했다는 전설의 조세인데 일정한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그중 10분의 1의 땅에서 나온 수확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고정비율의 세금이다.

 

이전에는 고정액을 바치는 제도였다. 고정액을 바치면 조세가 상향평준화 된다는 문제가 있다. 관료들은 실적 때문에 더 많이 거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공평하고 정밀한 세금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세계역사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제도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을 이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여론조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12년인 1430년 공법 시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무려 172,468명의 의견을 묻는 최초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이때 조선인구가 대략 6백만으로 보는데 절반이 노비인 것을 감안하면 3가구 중 1곳은 조사에 응한 것이다.

 

결과는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으로 찬성이 57%였다. 조사기간은 무려 5개월이었고 조사방법은 1대1면접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는 상대적으로 땅이 비옥한 영호남은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였고 척박한 서북지역은 정반대였다. 또한 3품이하 하급관리들은 찬성이 많고 고위관리들은 반대의견이 많았다. 지역별, 계층별로 이해 관계에 따라 의견이 갈린 것이다. 공법은 반대 의견을 계속 수렴해서 제안된지 17년만에 연분 9등법 등으로 절충되어 실시된다. 그리고 우리세법의 기본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당시의 재정은 세종때는 1년에 4백만석의 생산을 기록하고 1년 비축미만 125만석이 될 정도였다. 선조이후에는 정부의 1년 세입이 대부분의 기간동안 쌀, 콩, 조를 통틀어 23∼24만 석에서 50만석을 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국가재정상태였다. 여진족부대를 운영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며,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와 위구르까지 연구진을 파견하는 능력은 이런 국가재정의 힘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부흥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 성군은 훌륭한 정책에서 나왔고, 그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이끌어냈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갑갑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12년전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600년전으로 후퇴한것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