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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나라살림 연구소

[15.8] “우리 사업 돈 받을 수 있게 힘 좀 써달라”…주민참여 예산위원에 로비하는 자치구들

[한겨레] 15.8.7 허승 기자


올해 처음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뽑힌 ㅅ(28)씨는 지난 5월께 같은 자치구 소속 참여위원한테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받았다. 같은 구 참여위원끼리 친목을 다지자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인 고급 일식집에 들어선 ㅅ씨는 참여위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구청 예산담당 공무원 4명을 만났다. 당황한 ㅅ씨에게 이들은 “경계하지 마시라. 같은 구이지 않냐.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밥값은 구청 쪽이 냈다. 그날 이후 구청에서는 ㅅ씨에게 문자메시지와 메신저로 구청 사업 리스트를 보냈다. 도로 정비나 녹지 조성 등이 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되게 힘을 써달라고 했다.

서울시가 4년째 운영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애초 취지와 달리 자치구들의 ‘예산 챙기기 무대’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주민들이 직접 서울시 예산의 일부를 짜도록 한 제도다. 매년 500억원 규모를 주민참여예산으로 편성하는 서울시는 250명(공모 선발 225명, 구청 추천 25명)의 참여위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주민·자치구 제안 사업을 검토해 총회에 상정하고 최종 선정(참여위원투표 45%, 시민전자투표 45%, 설문조사 10%)에 참여한다.

다른 자치구 참여위원 이아무개(26)씨는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구청에서 전화가 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위원들끼리도 ‘그쪽 구는 뭐 먹었냐? 우리는 어디를 갔다’는 식의 이야기를 공공연히 나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지원은 미비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씨는 “수백 수천개 사업을 검토해야 하는데 자료가 회의 하루 이틀 전에야 오고, 그마저도 부실한 경우가 많다.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심사하고 투표해야 하니 결국 구청에서 추천해준 사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울시가 지난달 25일 발표한 498억원 규모의 524개 참여예산사업 선정 결과를 보면 ‘가로등·보안등 설치 및 정비’나 ‘도로 포장’ 같은 건설 분야가 건수로는 가장 많은 96건(91억2600여만원)이다. 그 뒤로 ‘시시티브이(CCTV) 설치’나 ‘공공청사 활용 방안’ 등 경제산업 분야(94건·115억1600여만원)가 많다. 환경 분야에서는 16개 자치구가 ‘노후 하수관로 개선 사업’을 따갔다. 자치구가 기본적으로 부담해야 할 기초 사업이 상당수다. 그런 탓에 구청에서는 ‘참여예산 ○○억원 확보, ○위’라는 문구를 내걸고 경쟁적으로 성과를 홍보한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원은 “시범적 정책사업을 우선 선정해 시행하고 사업타당성이 있으면 본예산에 편성하도록 운영해, 주민참여예산제를 정책의 다양성과 주민 참여를 보장하는 창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